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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실 홍실 우리화투 제작 기저 |
청실 홍실 우리화투 제작 기저
한국의 자연환경, 한국의 24절기, 한국의 세시풍속, 문화관광부선정 100대 문화 상징, 청실홍실 유래, 농가월령가, 애국가 한국인이 즐겨 부르는 노래 월드컵 응원가 모음 등을 분석하고
1,000여 명의 자문을 토대로 하여 우리나라의 자연과 민속과 문화 중에서 엄선하고 10년여의 노력 끝에 ‘청실홍실 우리화투’를 만들고 ‘청실홍실 우리화투’라는 이름으로 특허청에 상표등록(제40-0836474호)을 하였다. <월별 화투의 구체적인 배경>
가. 1월 화투의 작성배경
설날
우리나라에서 설날은 추석과 더불어 2대 명절 중의 하나로 음력 1월 1일이다. 일제 강점기에 양력을 시행하면서 양력 1월 1일인 신정에 빗대어 구정(舊正)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신정과 구정 모두 일본식 한자어이며 ‘설날’이 바른 표현이다.
우리나라의 설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인 기록은 7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서에 나타난다. 『수서』와 『구당서』의 신라 관련 기록에는 왕권 국가로서의 설날의 면모가 잘 나타난다. 즉 ‘매년 정월 원단에 서로 경하하며, 왕이 연희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는 기록은 국가 형태의 설날 관습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고려사(高麗史)』에도 설날[元正]은 상원(上元)․상사(上巳)․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중구(重九)․팔관(八關)․동지(冬至)와 함께 9대 속절(俗節)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식․단오․추석과 더불어 4대 명절의 하나였다.
삼국시대에도 이미 설의 세시풍속이 상당히 있었지만 고려시대에 와서는 더욱 다양해졌으며 이는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다. 실상 오늘날 논의되는 설을 비롯한 각 달의 세시풍속은 고려 때 정착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세배는
섣달 그믐께나 정초에 친족과 웃어른을 찾아가서 문안하는 뜻으로 올리는 의례적인 인사다. 새해를 맞이하여 정월 초하루를 시작으로 정초에 하는 세배를 ‘새 세배’라 하고, 섣달 그믐날께에 한 해가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올리는 세배를 ‘묵은 세배’라고 한다.
백두산은 『삼국유사』에 환웅이 ‘태백산’(太白山)에 내려와서 인간세상을 다스리고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단군신화의 태백산이 지금의 백두산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백두산을 우리 민족의 성스러운 산(聖山)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며 지금도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성스러운 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나. 2월 화투의 작성배경과 의미 1) 화투 작성의 배경
봄을 상징하는 입춘은 24절기 중 첫째로 새로운 해의 시작을 의미한다. 예부터 입춘절기가 되면 농가에서는 농사 준비를 한다.
매화는 매화나무의 꽃을 매화라고 하며 열매를 매실(梅實)이라고 한다. 매화나무의 원산지는 중국 장강의 중류 후베이성의 산악부로 알려졌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관상용으로 정원에 심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부 이남지방에서 잘되며. 이복 지방에서는 열매가 맺지 않아 과수로서의 재배가 되지 않는데 지구의 온난화로 이제는 경기도 이북 지방에도 열매가 탐스럽게 열리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매화의 고자(古字)는 '某'인데'梅'의 본자이다. 강희안(姜希顔)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의 화목 9등 품론에서 1품으로 분류하였다.
매화는 그 성품이 곧고 냉철하며, 혹심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도 투철한 정신과 강인함으로 흐트러짐 없이 견디며, 굽힐 줄 모르는 절개와 지조와 따뜻한 가슴이 있기에 아름다운 미소를 지닐 줄 알고, 영혼을 맑게 하는 청향 을 간직하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삼았고 있다.
매화는 절개를 표현하는 꽃 중에서 일품에 속하며 절개를 비유할 때 매화나무. 소나무. 대나무. 등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매화를 가리켜 화계의 영수 또는 화중선, 화중군자, 화중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폭풍 한설 속에서도 꽃을 피운다고 해서 설중매라 한다.
우리나라 열매이용은 한의학이 도입된 고려 중엽 이후부터라고 알려졌으며 늙은 몸에서 정력이 되살아나는 회춘(回春)을 상징하였다. 또한 사랑을 상징하는 꽃 중에서 으뜸이며 시나 그림의 소재로도 많이 등장한다.
까치는 나라의 상징인 국조를 선정하는 것은 1782년 미국 의회에서 특산종 흰머리수리를 국조로 지정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에서는 한국일보사 과학부에서1964년 10월부터 12월까지 2개월 간에 걸쳐 국제조류보호회의(ICBP) 한국 본부와 관계 학계의 후원을 얻어 ‘나라새 뽑기’ 운동을 벌였는데 그 결과 전국적인 공개응모에서 총 2만 2780표 중 9373표로 다수표를 차지한 까치가 뽑혔다.
이러한 결정은 ICBP 본부(영국)에도 보고가 되었다. 까치는 예로부터 한국의 민화와 민속에 자주 등장하는 친밀한 새로서, 특히 아침에 우는 까치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준다 하여 길조로 여겨져 왔습니다.1964년 10~12월 한국일보 과학부가 국제조류보호회의(ICBP) 한국본부와 관계학계의 후원을 얻어 시행한 ‘나라새’ 뽑기 공개응모에서 2만 2,780여 통 중 9,373통의 압도적인 표를 얻어 나라 새로 뽑혔다. 점차 감소되어가던 까치는, 1966년 2월 24일 산림청 조수보호위원회가 수렵조류에서 까치를 제외시킴으로써 보호받게 되었다.
나라 새는 애조사상(愛鳥思想)을 고취하며 민족을 상징한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우리 속담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근거가 있다.
까치는 동네 어귀의 높은 나무나 예전의 전봇대 등에 둥지를 틀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이 까치는 시각이 사람보다 발달했고 후각 역시 사람보다 뛰어나서 주위의 냄새는 물론 사람의 냄새도 기억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에 늘 드나드는 마을 사람이나 마을의 짐승을 멀리서도 알아볼 수가 있고 그 냄새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에 낮선 사람이 들어오거나 다른 짐승이 마을에 들어오면 어김없이 냄새로 ‘낯선 것’임을 파악하고 경계의 표시로 울어댄다고 한다.
따라서 까치가 갑자기 울어대면 틀림없이 평상시와는 다른 냄새를 맡았다는 표식이라는 것이다. 나. 3월 화투의 작성배경과 의미 1) 화투 작성의 배경
삼월 삼짇날은
봄을 알리는 명절이다.
음력 3월 3일을 삼월 삼짇날이라고 한다. 옛말에 ‘삼질’이라고도 하며, 삼짇날은 삼의 양이 겹친다는 의미이다. 최남선에 의하면 삼질은 삼일의 자음(字音)에서 변질되어 파생된 것이며, 상사는 삼월의 첫 뱀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삼짇날이 언제부터 유래하였는지 자세히 전하는 바는 없다. 최남선에 의하면 신라 이래로 이날 여러가지 행사가 있었으며, 이 풍속은 조선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또 옛사람들은 3월의 첫 뱀날[巳日]을 상사(上巳)라 하여 명일(名日)로 여겼으나, 그 후 상사 일이 들쭉날쭉함을 불편이 여겨 마침내 3월 3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날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고 하며, 뱀이 동면에서 깨어나 나오기 시작하는 날이라고도 한다. 또한 나비나 새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경북 지방에서는 이날 뱀을 보면 운수가 좋다고 하고, 또 흰나비를 보면 그해 상을 당하고 노랑나비를 보면 길하다고 한다.
이날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며, 집안 수리를 한다. 아울러 농경제(農耕祭)를 행함으로써 풍년을 기원하기도 한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
옛날에 흥부와 놀부라는 형제가 살았는데 동생 흥부는 마음씨가 착하구 형 놀부는 맘대루하는 심술쟁이, 욕심꾸러기였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흥부네 식구들을 쫓아냈어요. 흥부는 자식이 많은데다가 가난하기도 햇어요..흥부는 형네집에 가서 보리쌀을 달라고햇어요...그리고는.. 놀부의 아내는 밥주걱으로 흥부를 철썩때렸어요. 그리고는 흥부는 빈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왔어요. 따뜻한봄이왔어요. 가난한 흥부네 집 처마 밑에도 제비들이 집을 짓고 알을 낳았죠..
어느날, 제비집에 구렁이 한 마리가 나타났죠..
흥부는 급히 구렁이를 쫗았지만... 새끼제비 한마리가 다리를다쳤어요..그리고 흥부는 정성껏 보살펴 주었어요 가을이 되자 제비들은 흥부네 집을 한바퀴 돌고는 하늘 멀리 날아갔지요.. 다음해 봄이에요.. 어디에선가 제비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리고는 제비가 박씨를 떨어뜨리고 갔지요.. 흥부는 박씨를 담 밑에 정성껏 심었어요.며칠후.. 금세 쑥쑥 자라기 시작햇죠 그리고 커다란 박이 주렁주렁 열렸어요..흥부와 아내는 박을 탔어요.. 첫 번째 박에서 흰쌀이 쏟아져 나오고.. 두번째에서 금은 보화가 나왔어요. 그리고 목수들이 나와서 대궐갔은 집을 지어주었죠. 그리고 놀부는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시고 제비가 박씨를 가져다 주엇죠..그리고 박이열리고 놀부 부부는 박을 탔어요.
첫번째 박이 갈라졌는데 똥물이 쏟아졌어요.. 두번째는 도깨비들이 나와 몽둥이로 마구 두들겼어요.. 그리고 세번째 박은 마귀들이 나와서 집을 부수어 버렸어요. 그리고 흥부를 찾아가 용서를 빌고 흥부와 놀부는 의좋게 살았어요..
벚꽃은 해방과 함께 일제의 잔재라 해 수난을 당했다. 쌍계사 10리 벚꽃터널도 하마터면 잘려나갈 뻔했다. 세월이 지나 벚꽃이 우리 것이라는 설이 굳어지면서 75년 조성된 전주-군산간 1백리 벚꽃터널, 경주 보문단지 등 벚꽃은 봄의 여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벚꽃 나무가 일본에 건너 간 것은 고대에 한국 불교가 일본에 포교되던 서기 6세기경부터로 보며 일본 사쿠라회 회원인 타카키 키요코 교수는 그의 저서 ‘사쿠라(쥬우오우공론사 1995)에서’ ‘소메이 요시노 사쿠라’의 원산지는 제주도다’라고 했다.
라. 4월 화투의 작성배경
버드나무는 버들·뚝버들이라고도 한다. 들이나 냇가에서 흔히 자란다. 높이 약 20m, 지름 약 80cm이다. 나무껍질은 검은 갈색이고 얕게 갈라지며 작은가지는 노란빛을 띤 녹색으로 밑으로 처지고 털이 나지만 없어진다. 잎은 어긋나고 바소꼴이거나 긴 타원형이며 길이 5∼12cm, 나비 7∼20cm이다.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안으로 굽은 톱니가 있다. 잎자루는 길이 2∼10mm이고 털이 없거나 약간 난다.
꽃은 4월에 유이꽃차례로 피고 암수딴그루이다. 수꽃은 길이 1∼2cm이며 꿀샘과 수술이 2개씩이고 수술대 밑에는 털이 난다. 암꽃은 길이 1∼2cm이고 1∼2개의 꿀샘이 있다. 꽃대에 털이 나고 포는 녹색의 달걀 모양이며 털이 난다. 씨방은 달걀 모양으로서 자루가 없으며 털이 나고 암술대는 약간 길며 암술머리는 4개이다.
열매는 삭과로서 5월에 익으며 털이 달린 종자가 들어 있다. 가로수와 풍치목으로 심으며 나무껍질을 수렴제·해열제·이뇨제로 사용한다. 한국·일본, 중국 북동부 등지에 분포한다. '사랑하는 수선. 사랑받는 수양버들'. 수선은 꽃 모양 덕분에 남자를 의미하고 수양버들은 미인을 가리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옛날 말이 참 멋지다. 수양버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은 흔히 여성에 비유되고 있다. 우리 나라만이 아닌 모양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 신화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태양의 신 아폴론의 이륜차에서 파에톤이라는 아가씨가 떨어져 죽었다. 동생 헤리아데스가 그 죽음을 애도해 파에톤의 모양을 수양버들로 바꾸었다고 한다. 수양버들에서 드리운 긴 녹색 가지는 파에톤의 슬픈 눈물, 수양버들이 습기를 좋아하는 것은 이 눈물 때문이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조하여 만든 배이며, 거북선은 판옥선이 격군(노젓는 군사)을 보호하기 위해 덮개가 있는데 비해 그 덮개 위에 거북 잔등판을 둥글게 씌워 포수(대포쏘는 군사)도 보호하였다.
거북선은 용머리를 달아 그 구멍으로 대포를 쏘거나 유황을 태운 연기를 피워 적군을 공격하였다. 거북선은 위에는 판자로 덮고 칼과 송곳을 꽂아 적들이 발붙일 수 없도록 하고, 앞뒤, 좌우 방패에 6개의 대포구멍을 내었으며 그 모양이 거북 형상과 같기 때문에 거북선이라 했다. 좌수영 거북선 특징으로는 용머리 아래에 귀신 머리 모양의 조각이 달려있다고 돼 있다.
명량 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년)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3척을 쳐부순 해전이다. 조선 수군의 승리의 요인이었던 것은 늘 전함과 함포였다. 일본군 전함은 첨저선으로 뱃머리가 뾰족하고 판자의 연결에 쇠못을 사용한 아타케부네(安宅船)고, 조선군의 전함은 뱃머리가 둥글고 나무못을 사용한 판옥선이다. 또한 판옥선의 크기는 일본군의 가장 큰 배인 아타케부네보다 컸다. 뱃머리가 둥글다는 것은 물에 잠기는 부분이 적어 회전이 용이하였고, 반면 쇠못은 녹이 슬어 부식되는 결과를 가져와 배의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었고, 충격에 약해 쉽게 파손되었다. 조선 수군은 포격전만으로 전투를 수행하지 않았고, 필요한 경우나 불가피한 경우 충각전술로 일본군의 배를 부서뜨리는 돌격전법도 자주 구사했던 것도 이러한 배의 특성 덕분이었다. 다만 거북선이 없었다. 함포는 임진왜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효과 좋은 조선군의 무기였다. 다양한 종류와 구경의 화포를 사용하였으며, 오늘날 다연장포에 비교할 수 있는 신기전, 박격포에 해당할 비격진천뢰, 대형 로켓 병기라 할 만한 대장군전 등 신무기도 많이 사용되었다. 반면 일본군은 화포 주조 능력이 조선에 비해 뒤떨어져 그나마 있는 화포도 갑판 바닥에 고정해서 사용하지 않고 상부 구조물에 매달아 사용했다. 배가 약해서 포의 반동을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중에 줄로 주렁주렁 매달린 화포는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또한 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한 이순신의 전략과 병사들의 사기도 승리의 요인으로 들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은 울돌목에 쇠사슬을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은 해협에 설치된 ‘쇠사슬’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목포의 해양 방어 사령부에는 지금도 수백 척의 배를 끌어당길 때 쓰는 ‘막개’가 있는데 학자들은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이런 막개를 이용한 쇠사슬 전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울돌목의 폭은 280∼320미터 안팎이다. 여기에다 배를 끄는 데 필요한 쇠사슬의 길이를 감안하면 450미터 안팎의 쇠사슬이면 충분하다. 쇠사슬의 무게는 배의 무게를 감안하여 4톤 정도로 추정했다.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忠武公 李舜臣 誕辰日)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나라 사랑에 대한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제정한 기념일이다. 매년 4월 28일이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 왜병과 싸워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열린다. 1973년에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이전에는 명칭이 충무공 탄신일(忠武公 誕辰日)이었으나 2013년에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마. 5월 화투의 작성배경
난초는 외떡잎식물 중에서 가장 진화된 식물군으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피는 종이 다양한 주요 관엽식물로 애호가가 많다.
원예상에서는 동양란과 양란(서양란)으로 구별하고 있다. 동양란은 한국 ․일본 ․중국에 자생하는 것이며 보춘화 ․한란 등의 심비디움속(Cymbidium)과 석곡(石斛) ․풍란(風蘭)을 포함한다. 난초는 사군자 즉 매(梅)난(蘭)국(菊)죽(竹)은 각 계절의 상징적인 초목이며 꽃이 아름답고 향기가 강해서 그 청아한 자태와 어울려 문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향기의 대명사가 난초이다.
한국에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허황옥(許黃玉)을 맞이할 때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난초를 넣고 빚은 술을 대접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기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부터 난초는 문인화의 소재로 등장해 매화 ․대나무 ․국화와 함께 사군자(四君子)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 난초를 소재로 하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조선 초기 강세황(姜世晃)의 《필란도(筆蘭圖)》를 들 수 있다.
나비라는 말은 처음 나불나불 나는 모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1481년에 나온 두시언해에는 나비 또는 나뵈로, 1527년에 나온 시몽언해물명에는 남이로 나온다. 그 후로는 나븨 또는 나비로 불려오다가 현재 나비가 표준말이 되어 쓰여지고 있는데, 아직도 지방에 따라서는 나부 또는 나베라 부르는 곳도 있다.
나비는 나비목에 속하는 날개 달린 곤충 중에서 팔랑나비상과와 호랑나비상과에 속한 종들을 말한다. 나비마니아 중에는 나비채집과 우화를 목적으로 한 나비애벌레사육이 취미인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곤충이다.
전설 속의 태극나비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 어느날 이었다.나비가 나올 춘삼월도 아닌데 갑자기 나비가 떼를 지어 날아와 온산을 뒤덮었다. 며칠동안 영남루가 서 있는 뒷산을 덮으며 날아 다니던 나비는 죽은 흔적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나비의 날개에 태극 묘시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나라가 혼란에 휩싸여 있었던 때라, 어떤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과연 사람들의 말처럼 얼마 아니되어서 고려가 건국되고 사회혼란이 가라 앉아 태평성대를 맞게 되었다. 그 후에도 가끔 이 태극나비가 나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라에 경사가 있었다.
그래서 고려초에는 이 나비를 보호하라는 명을 내렸고 국성접(國成蝶)이라 부르게 하였다. 그런데 이 나비는 이조 오백년과 일제 삼십육년간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가 1945年 8月 15日 오후 3시쯤 한쪽 날개는 감청색깔 또 한쪽 날개는 기명색깔의 태극무늬를 한 손바닥 만큼큰 태극 나비가 무봉사 법당에 날아 들어와서 사흘만에 죽었다. 이를 곱게 표본으로 만들어 서울 박물관에 보냈다.
또 그해 8月 19日과 10月 25日에도 태극나비가나타났는데 그 중 한마리는 이승만 대통령께 보내고 또 다른 한마리는 무봉사에 보관하고 있다.
바. 6월 화투의 작성배경
모란꽃은 모란꽃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당나라 당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붉은색, 보라색, 흰색의 모란꽃 그림과 꽃씨 세되를 보냈다. 그리고 선덕여왕은 그 그림을 보고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 후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이것은 바로 당나라 황제가 과인이 짝이 없는 것을 조롱하는 것이다"라고 말 한다.
그래서 모란은 향기가 없는 꽃인줄 알았다. 그러나 향기가 코를 찌른다. 목단은 모란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인 목단(학명 : Paeonia suffruticosa Andrews)과 작약(학명 : Paeonia lactiflora Pall. var. hortensis Makino)은 꽃이나 잎이 너무 비슷하여 구분하기가 만만치 않다. 전문가도 꽃만 놓고 구별하는 게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의외로 구별법은 간단하다.
둘 다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해 있지만 목단은 ‘목본(나무)’인 낙엽관목이고 작약은 ‘초본(풀)’인 여러해살이풀이다. 줄기를 보면 나무인 목단인지 풀인 작약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나무라 해도 목단은 1m에서 1m50cm 정도가 최대 크기이므로 여느 나무처럼 굵직하진 않다.
목단은 땅 위의 전년도 가지에서 싹이 트지만 작약은 흙 속(뿌리)에서 새싹이 나온다. 향이 없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향이 그윽하다.
꽃의 화사함과 풍성함, 그리고 꽃 향기의 우아함이 매력 포인트다.
우리나라에서도 목단꽃 그림을 병풍으로 만들어 혼례 때나 신방을 꾸밀 때 사용하였다. 옛날에는 부귀영화를 부른다 하여 목단 작약을 실로 곱게 뜬 수나 그림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사랑을 받던 꽃.
‘목단’은 지금도 화투 속에서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고 한다 .
모란이 피기 까지는 /김영랑의 시는 유명하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림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5월 어느 날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도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꿀벌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인간도 4년 내에 사라진다”라는 예언을 했다고 하니, 꿀벌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식량 위기 문제는 ‘꿀벌’에게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꿀벌은
일반적으로 양종(洋種) 꿀벌 및 재래종을 말한다. 이 밖에 야생인 꿀벌이 있는데 산지의 나무구멍 등에 집을 만들며, 일부에서는
사육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벌꿀을 따기 위해 사육되고 있는 것은 유럽 원산의 양종 꿀벌이 주종이다. 꿀벌은 인도 북부 지역이 원산지로, 밀원을 찾아 이동하면서 동양종과
서양종으로 진화하였다. 동양종은 열대 및 아열대성으로 한국 ·중국 ·일본에 분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2,000년 전부터 꿀벌을 사육하기 시작했다고 하며, 삼국시대부터 양봉이 보급되었다. 현재의 양봉은 독일인 선교사에 의해
이탈리아 계통의 꿀벌이 들어와 시작되었다. 토종벌인 경우에는 몸길이가 약
12㎜정도이며 전체적으로 노란색 털이 덮여 있다.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남서부가 원산지이며 아시아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양봉의 주된 종인 서양 꿀벌은 뒷날개의 모양으로
구분한다. 꿀벌은 매우 질서정연한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데, 1마리의 여왕벌을 중심으로 수십 마리의 수펄 그리고 일벌이 모여 살고 있다. 일벌은 겨울이 다가오면 월동 식량의 절약을 위해 수펄을 죽이거나 집 밖으로 쫓아버린다. 일벌은 이른 아침부터 화분과 꿀을 수집하여 집으로 운반한 후 저장한다. 벌집은 일벌의 가슴 부분에서 분비되는 일종의 납양물질(蠟樣物質)과 수지로 만들며, 그 위쪽에 꿀을 저장한 뒤 밀랍(蜜蠟)으로 이것을 봉하고, 아래쪽에는 유충의 식량인 꽃가루를 저장한다.
또한 꿀벌에서는 선악을 구별하는 힘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여서, 음탕한 여자나 젊은이는 찔린다고 하였으며 예언의 능력을 가진다고 하며, 가을의 꿀벌의 모습에서 겨울의 추위를 알 수 있다든지, 벌이 한꺼번에 많이 죽으면 역병이나 재앙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또한 꿀벌은 죽음과 불사, 근면, 웅변 등과 결부 되기도 한다.
사. 7월 화투의 작성배경
한국인삼은 주로 한국, 중국, 일본에서 재배된다. 일반적으로 4~5년생의 뿌리를 건조한 제품으로 조제법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세근과 코르크 껍질을 벗기고 일건한 것을 백삼, 껍질이 붙은 그대로 쪄서 건조한 것을 홍삼이라고 한다. 특수 성분으로 사포닌 배당체를 함유하여 강장, 강정약 외에 신진 대사기능의 감쇠에 따르는 각종 증상에 사용한다. 해방 이전에 개성에서 나는 인삼의 상품명으로 고려인삼이라 알려져 있다.
세계적으로 인삼은 크게 고려인삼(Panax Ginseng)과 미국삼(Panax Quinquefolius)으로 구분되며 엄격히 말해 인삼이라 하면 고려인삼(Panax Ginseng)을 가리킨다. 고려인삼은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에만 자생하는 생약 (산삼)으로서 이미 4~5천년 전부터 민간에서 약용으로 사용되어 오면서 그 효능이 경험적으로 인정되었다. 수요의 증가와 더불어 약 천년 전부터는 인공 재배가 시작되었으며, 세계적으로 성가가 높은 고려인삼의 고려라는 말도 이 시대의 국명을 가리킨다. 그리고 16세기부터는 오늘날과 같은 재배방법이 정착되었다.
백두산 호랑이는 한국호랑이라고도 하며, 호랑이라는 동물은 한국사람들 한테는 매우 친근한 존재이다. 호랑이는 본래가 용맹스런 동물이고 호랑이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숭앙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옛 조상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 세 가지가 보릿고개와 양반 그리고 호랑이이었다고 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88올림픽의 주제가 [손에 손잡고]는 정말 세계인들도 감동적이고 역대 최고의 올림픽노래라고 하였으며 서울 88올림픽의 마스코트는 백두산 호랑이를 형상화한 호돌이는 전 세계를 누볐었다.
아. 8월 화투의 작성배경과 의미 1) 화투 작성의 배경
무궁화 무궁화의 역사적 연원은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상고사를 재조명하는 ‘단기고사(檀奇古史)’에는 ‘근수(槿樹)’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환화(桓花)’나‘천지화(天指花)’로 표현돼 있다. 897년 신라 효공왕 때 최치원이 작성해 당나라 광종에게 보낸 국서에서는 우리나라를 ‘근화향(槿花鄕)’이라 지칭했다.
고려시대에는 ‘무궁화(無窮花)’ 명칭이 처음으로 나오며 구한말에는 국학운동에 의해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부각돼 한반도를 가리키는 ‘근역(槿域)’이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1893년에는 남궁억이 윤치호와 의논해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정했으며 그로부터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가사를 넣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가 발행한 대한독립선언서 상단에 태극기와 무궁화가 도안되는 등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지사들에 의해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표상으로 고양됐다.
한가위는 한국 4대 명절의 하나인 음력 8월 15일은 중추철, 가배, 가위, 한가위라고도 한다. ‘가배’는 ‘가위’로 이어진 추석을 뜻하는 우리 말이다.
중추절이라 하는 것도 가을을 초추․중추․종추 3달로 나누어 음력 8월이 중간에 들었으므로 붙은 이름이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유리이사금 조에 의하면 왕이 신라를 6부로 나누었는데 왕녀 2인이 각 부의 여자들을 통솔하여 무리를 만들고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모여서 길쌈, 적마를 늦도록 하였다.
8월 15일에 이르러서는 그 성과의 많고 적음을 살펴 진 쪽에서 술과 음식을 내놓아 승자를 축하하고 가무를 하며 각종 놀이를 하였는데 이것을 가배라 하였다. 이 때 부른 노래가 슬프고 아름다워 회소곡이라고 하였는데, 이 행사를 가배라 부른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가배의 어원은 '가운데'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본다. 즉 음력 8월 15일은 대표적인 우리의 만월 명절이므로 이것을 뜻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다음은 진 편에서 이긴 편에게 잔치를 베풀게 되므로 ‘갚는다'는 뜻에서 나왔을 것으로도 유추된다. 고려시대에 나온 노래인 《동동》에도 이 날을 가배라 적었음을 보아 이 명칭은 지속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가윗날이 신라이래 국속으로 지속되었음은 중국에서 나온 《수서》 동이전 신라 조에 임금이 이 날 음악을 베풀고 신하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상으로 말과 천을 내렸다고 하였으며, 《구당서》 동이전에도 신라국에서는 8월 15일을 중히 여겨 음악을 베풀고 잔치를 열었으며 신하들이 활쏘기 대회를 하였다고 쓰여 있다.
강강술래는 1966년 2월 15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해마다 음력 8월 한가윗날 밤에, 곱게 단장한 부녀자들이 수십 명씩 일정한 장소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원형으로 늘어서서,㰡강강술래㰡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노는 놀이이다. 강강술래를 할 때는 목청이 좋은 여자 한 사람이 가운데 서서 앞소리[先唱]를 부르면, 놀이를 하는 일동은 뒷소리[合唱]로 후렴을 부르며 춤을 춘다.
강강술래는 삼한시대 오월제와 시월제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며, 임진왜란 때, 당시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인 이순신(李舜臣)이 수병을 거느리고 왜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적의 군사에게 해안을 경비하는 우리 군세의 많음을 보이기 위하여, 또 왜군이 우리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특히 전지(戰地) 부근의 부녀자들로 하여금 수십 명씩 떼를 지어, 해안지대 산에 올라,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돌면서 㰡강강술래㰡라는 노래를 부르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뒤 그곳 해안 부근의 부녀자들이 당시를 기념하기 위하여, 연례 행사로서 㰡강강술래㰡 노래를 부르며 놀던 것이 전라도 일대에 퍼져 전라도 지방 특유의 여성 민속놀이가 되었다.
'강강술래'라는 말은 한자의 '强羌水越來'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강강'의 '강'은 주위 ․원(圓)이란 뜻의 전라도 방언이고, '술래'는 한자어로 된 '巡邏(순라)'에서 온 말로서 '경계하라'는 뜻이니, 이는'주위를 경계하라'는 당시의 구호인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주위의 뜻인 '강'이 둘 겹친 것은 특히 주위에 대한 경계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술래'가 '수월래'로 들리며, 그렇게 기록되기 쉬운 것은, 진양조(晋陽調 또는 진양)로 길게 뽑을 때 '수월래'로 들리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표기는 '강강술래'라고 하는 것이 옳다.
삼족오(三足烏) 또는 세발까마귀는 고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태양 속에 산다고 여겨졌던 전설의 새이다. 해를 상징하는 원 안에 그려지며, 종종 달에서 산다고 여겨졌던 원 안의 두꺼비에 대응된다. 삼족오는 신석기 시대 중국의 양사오 문화, 한국의 고구려 고분 벽화, 일본의 건국 신화 등 동아시아 고대 문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삼족오'는 3개의 다리가 달려있는 까마귀를 의미한다.[1] 그 이유를 들자면 여러 가지가 있는데, 태양이 양(陽)이고, 3이 양수(陽數)이므로 자연스레 태양에 사는 까마귀의 발도 3개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삼신일체사상(三神一體思想), 즉 천(天)·지(地)·인(人)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또 고조선 시대의 제기로 사용된 삼족정(三足鼎)과 연관시켜 ‘세 발’이 천계의 사자(使者), 군주, 천제(天帝)를 상징하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 및 재야사학에서는 삼족오의 기원이 한민족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2][3]
한국에서는 씨름무덤(각저총), 쌍영총, 천왕지신총 등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삼족오가 많이 그려져 있다. 《삼국유사》의 기이편(紀異扁)에는 소지왕 10년 때에 까마귀가 나타나 사람에게 해야할 일이나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영험한 존재로 등장한다. 일본의 기원과 관련이 깊은 신라의 연오랑과 세오녀 전설에서도 삼족오가 등장하는데, 연오랑(燕烏郞)과 세오녀(細烏女)의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둘 다 이름에 까마귀 오(烏)자가 붙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까마귀를 빛의 상징으로 보았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의천의 가사에서 보이며, 조선 시대에는 일부 묘석에 삼족오가 새겨져 있다. 한국의 삼족오는 중국과 일본의 삼족오와는 달리 머리에 공작처럼 둥글게 말린 벼슬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그 외형에서 확실한 차이점이 있다. 벼슬은 국가통치조직에서 나랏일을 담당하는 직위나 직무를 상징한다. 약식의 유래는 고려시대 후기 때 승려 일연이 1281년에 쓴 삼국유사 사금갑(射琴匣)조에 기록되어 있다. 488년 신라의 소지왕이 음력 1월 15일에 왕이 경주 남산에 있는 정자인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다. 이때에 까마귀가 날아와 왕이 신하들에 의해서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 덕분에 왕은 역모를 꾀하려던 신하와 궁주(宮主)를 활로 쏘아 죽여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때부터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烏忌日)로 정하여, 까마귀를 기념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지냈으며, 약식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자. 9월 화투의 작성배경과 의미 1) 화투 작성의 배경
국화는 동양에서 재배하는 관상식물 중 가장 역사가 오랜 꽃이며, 가을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꽃으로 사군자의 하나로 귀히 여겨왔으며 귀중하고 소중한 관상용 원예 꽃이다. 구절초는 5월 단오에 줄기가 다섯 마디가 되었다가 음력 9월 9일에 9마디가 된다하여 구절초라고 한다. 국화과 식물 중 소국으로 독감, 감기, 기관지, 인후염, 무월경, 고혈압 등에 민간요법으로 쓰이며, 세균 번식을 막고, 향수나 화장품 원료에도 쓰이고 술을 담가 먹기도 한다. 깊은 잠을 들게 한다고 하여 불면증에도 좋다.
국화는 여러해살이풀로서 꽃의 크기에 따라 대국, 중국, 소국으로 나누고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가을에 피는 추국, 겨울에 피는 동국, 여름에 피는 하국 등으로 구분한다. 국화는 한겨울 그 혹한에도 얼어죽지 않고 봄부터 무더운 긴 여름을 지나 늦가을 무서리를 맞아 가면서도 아름다운 그 자태와 향기를 그치지 않는다.
《양화소록》에 국화는 고려 충숙왕 때 전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 국화에 대한 중국의 문화적 인식과 관념도 그대로 전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 국화의 조상은 현재 한국에서도 자생하는 감국이라는 설, 산국과 뇌향국화와의 교잡설, 감국과 산구절초와의 교잡설 등 여러 가지가 있으며 재배를 시작한 시기는 당대(唐代) 이전으로 추정된다.
국화, 특히 황국(黃菊)은 신비한 영약으로 이를 달여 마시면 장수한다고 믿어 왔으며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환갑․진갑 등의 헌화로도 사용하였다. 예로부터 중양절에 국화주를 마시면 무병장수한다고 하였는데 고려가요 《동동》의 9월령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 역사는 오래되었다.
또한 백국(白菊)의 즙을 넣은 선약을 일정(日精)이라 하여 불로장수약으로 여겼다. 매화․난초․대나무와 함께 사군자의 하나로 고고한 기품과 절개를 지키는 군자에 비겼으며, 일찌기 도연명(陶淵明)이 국화를 예찬한 데서 군자와 국화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유교적 관념에 비추어 볼 때 국화는 의(義)를 지켜 꺾이지 않는 선비정신과 일치하는데, 은일화(隱逸花)라 하여 속세를 떠나 숨어 사는 은자(隱者)에 비유하였다. 불교에서는 만물이 나고 죽는 것을 색(色)이 곧 공(空)인 이치로 인식하듯이, 국화도 그러한 의미의 지시물로 생각하였다.
노을지는 가을풍경에 피어있는 국화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고 하며 하얀 국화의 꽃말은 ‘고결’, 빨간 국화의 꽃말은 ‘고상’, 노란 국화의 꽃말은 '시련'이고 불꽃을 닮은 스프레이 국화의 꽃말은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국화는 두통, 현기증, 안질 등을 치료하는 한약재로 쓰이며, 화분 등에 많이 재배하는 관상용 원예식물이다.
고추잠자리는 고추잠자리의 이름에 ‘고추’가 붙은 것이 단순히 몸이 빨간색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애벌레 생활을 마치고 물 밖으로 나와 우화(날개돋이)한 고추잠자리의 성충은 처음에는 빨간색이 아니다. 주황색이 약간 도는 밝은 노란색이다. 미성숙 상태에서 노란색을 띠던 고추잠자리는 성숙해 가면서 몸의 색깔이 변한다. 암컷은 몸 색깔이 점점 탁해지고 수컷은 몸 색깔이 점점 빨갛게 변하다.(성숙할수록 빨간색이 선명해진다). 즉, 혼인색을 띤다.
보통 빨간색 잠자리는 초가을부터 많이 보이기 때문에 고추잠자리의 성충이 초가을에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고추잠자리는 모두 빨간색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고추잠자리는 초여름부터 성충이 나타나는데 그 중 수컷이 성숙하여 혼인색을 띠는 시기가 초가을이기 때문에 초가을부터 빨간색의 잠자리가 많이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고추잠자리 수컷은 초가을에 몸 색깔이 빨갛게 변하는데 이것이 마치 초가을에 고추가 빨갛게 익는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꼬리(정확히는 배)가 빨갛다”고 하셨는데 성숙한 고추잠자리 수컷은 꼬리, 즉 배 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빨간색이고 날개의 기부도 빨간색이다.
고추잠자리가 “고추밭에 많다”고 하는데 경험에 의하면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논이나 잡초밭에도 많다. 그리고 산란기가 되면 수초가 많은 연못이나 저수지 위로 모아는데 물 속에 알을 낳기 위해서다.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고추잠자리’란 학술적으로는 Crocothemis servilia servilia 라는 학명을 가진 종의 우리말 이름이지만 민간에서는 이 종을 포함하여 초가을에 몸 색깔이 빨갛게 변하는 모든 잠자리를 가리켜 고추잠자리라고 하는 것으로 보잉다.
이 종(Crocothemis servilia servilia) 외에도 ‘좀잠자리속(Sympetrum)’에 속하는 많은 종(고추좀잠자리, 여름좀잠자리, 흰얼굴좀잠자리 등)의 수컷이 초가을에 몸 색깔이 빨갛게 변한다. 따라서 민간에서는 이런 것들을 모두 고추잠자리라고 부른다고 볼 수 있겠다.
차. 10월 화투의 작성배경
가을의 단풍은 조선후기의 손꼽히는 가객 남파 김천택은 일찍이 가을단풍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예찬했다. ‘흰구름 푸른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추상에 물든 단풍 봄꽃도곤 더 좋아라 /천공이 나를 위하여 뫼빛을 꾸며내도다.’
온 산을 울긋불긋한 원색으로 수놓은 단풍의 물결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신의 솜씨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단풍은 9월 중순 설악산에서 불붙기 시작하면 11월 중순경엔 제주도까지 번지며 북한산은 10월 하순이 절정기가 된다. 단풍나무는 겨울에 살아남기 위한 몸 만들기로 수분과 영양분 공급이 둔화될 때 태양이 염록소를 파괴하여 일어나는 자연 현상이다. 보통 15~20일간 물들이지만 계절과 관계없이 붉은 색이나 녹색을 띠는 단풍나무도 있다. 단풍나무는 200여종이나 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수십 종이 된다. 무지개도 여러 가지 색이 있어 아름답듯이 단풍도 색이 조화를 이루니 더욱 아름답다. 예쁘거나 밉거나 잘 났거나 못 생겼거나 차별하지 않고 공생하며 즐거움을 주므로 인간에게 시사 하는바가 많아 더욱 사랑한다. 사랑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보다도 더 아끼고 인정을 베푸는 마음이다. 단풍을 좋아하면 나무 가지를 꺾을 수 있지만 사랑하면 꺾지 않는 마음일 것이다.
단풍은 한 해의 삶을 마감하고 지상을 떠나는 잎새들의 마지막 향연이며 가을은 저물어 가는 계절의 뒷모습이다.
단풍의 아름다움은 실로 떠나는 것들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이 주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단순히 낙옆이 지는 것이 아니라 낙옆과도 같은 계절이 저물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우리들 아쉬운 삶의 한 구비 또한 이렇게 아름답게 저물어 간다.
천고마비의 말 가축의 하나이며 학명은 Equus caballus L.이다. 말의 조상이라고 생각되는 동물의 화석은 유럽·아시아·아프리카 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300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신생대 제3기층 초기의 지층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초기의 말은 체고(體高)가 25∼50㎝로서 머리와 목이 짧고 배면(背面)이 두드러지게 구부러졌으며, 4지(肢)가 매우 짧고 여우 정도의 크기로서 오늘날의 말과는 달리 앞다리에 4지(趾), 뒷다리에 3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났을 때는 미국과 유럽에 있던 말의 조상은 전멸되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만 조금 남아 있었다. 오늘날의 가축화된 말은 중앙아시아가 원산으로 추정된다. 소련의 탐험가인 프르제발스키(Przewalski)가 몽고의 중가리아(Dzungaria)사막에서 발견한 프르제발스키말이 야생말에 가장 가까운 체형을 가지고 있다. 야생말은 초원형·고원형·삼림형으로 나눌 수 있다.
말의 품종은 형태·능력·원산지·용도 등에 따라서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용도에 따라 승용(乘用)·만용(輓用:수레를 끄는 용도)·태용(駄用:짐을 싣고 나르는 용도)으로 분류한다. 또 체중에 따라 경종·중종·중간종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말의 가축화는 동부유럽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그 시기는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3000∼2400년경으로 추정된다. 말은 그 특수한 용도로 인하여 가축화된 이래로 세계 도처에 퍼져 사육되었으며, 과학문명이 근대화되기 이전에는 전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문헌에 기재된 재래마의 기록은 매우 많다. 말의 이용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원봉2년……우거청강태자헌마운운(元封二年……右渠請降太子獻馬云云)”이라는 [내용]으로 말을 사육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 밖에 군용으로 이용하였다는 기록과 신라에서는 거(阹)라는 말 목장의 수도 많았고, 목숙(苜蓿)을 대륙에서 들여와서 말의 사료작물로 재배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백제에서는 일본에 말을 보낸 사실도 있다. 다른 문물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중형마는 북방 계통으로 우리 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었다는 설이 인정되고 있다. 문헌적으로 우리 나라의 ≪삼국사기≫ 등에는 기록이 없다.
우리 나라에는 몽고 계통의 호마와 향마라는 두 계통의 말이 존재하였다.
말과 관련된 설화로는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설화가 전해진다. 기원전 69년 경주의 알천에서 6촌의 장들이 모여 군주의 선출을 의논하고 있을 때 남쪽 양산 밑의 나정에 백마가 무릎을 꿇고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자리에는 큰 알 하나가 있었고 그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박혁거세라는 것이다.
이 밖에 고구려의 명마 거루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대무신왕 때 부여와 전쟁이 벌어졌는데 골구천이라는 곳에서 거루라는 신마를 잃어버렸다. 일년이 지난 뒤 그 말이 부여마 100여 필을 이끌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제주마는 우리 나라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온 관계로 기후·풍토에 잘 적응되어 있고 체격이 강건하고 번식력이 왕성하다. 또 조식(粗食)과 조방(粗放)한 사양관리에도 잘 견딘다. 능력이 우수하여 105㎏의 짐을 질 수 있고, 1일 32㎞씩 22일간을 행군하더라도 잘 견디어내는 체력과 인내력이 있다. 특히 굽이 치밀하고 견고한 장점이 있다. 카. 11월 화투의 작성배경과 의미 1) 화투 작성의 배경
소나무(Pinus densiflora)는 줄기가 붉어서 적송(줄기가 검은 흑송도 있다.)이라고 부르며 육지에 많아서 육송(흑송은 바닷가에 많아 해송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이라고 부른다. 한평생 나무를 연구하신 임경빈 선생은 소나무를 ‘한민족 문화의 큰 기둥’이라고 표현하고 계시다. 목재로 건축재, 가구재, 기구재, 펄프재로 다양하게 쓰이고 소나무에서 얻는 송화가루, 송이버섯과 수많은 시문학과 회화에 등장하는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나무다.
애국가에도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우리민족과 친숙한 나무이다.
한국 농악의 유래는 삼국시대에 5월의 파종 후와 10월의 농공필(農功畢) 후에 하늘에 제사하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이 있었는데 이때 온 마을의 남녀노소가 한데 모여 며칠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고 술을 마시며 즐겼다 하니, 틀림없이 이때 벌써 농악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 고려가요 《동동(動動)》의 후렴에 나오는 ‘아으동동다리’라는 가사에서의 㰡동동㰡은 농악에서 쓰
이는 북소리의 의성(擬聲)인 㰡둥둥㰡에서 온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이제현(李齊賢)의 《해시(解詩)》에 전하는 《사리화(沙里花)》 같은 농부가와, 고려 제25대 충렬왕이 일반 농악에 관심이 커서 장려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들도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세종 ․세조 등은 농악과 농가에 대한 관심이 커서 선농가자(善農歌者)를 불러 연주하게 한 일이 있다. 또 농가구(農歌)를 도왔으며, 가기(歌妓)로 하여금 농가를 장려하게 하였다. 고종은 대단한 농악 애호가로서 경복궁 수축공사 때에는 밤마다 농악대회 같은 모임을 개최하여, 부역인들의 위안을 겸하는 등 농악육성에 힘썼다.
최근 농악의 유래에 관한 학자들 간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농악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파종과 추수를 축복하고 그 해 농가의 평안을 비는 음악이었다는 점에서 풍농․안택 기원설이 있다. 둘째, 전시에 적을 막아내기 위하여 연주되었다는 군악설이 있다. 셋째, 절의 건립을 위하여 승려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민가를 순방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불교관계설 등이 있다. 농악은 농자(農者)로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을 삼는 한국 민족과 뗄 수 없는 관련을 지니고 있다. 아침에 일터로 갈 때부터 저녁에 놀을 등지고 귀가할 때까지 늘 같이 해 왔다. 마을 전체의 행사인 기우제나 명절 등에는 반드시 동원되어 민중들의 솔직한 감정과 정서를 비교적 단순한 악기와 몸짓 ․춤들로 표현해 왔다. 어디서나 판을 벌일 수 있고, 누구나가 즐길 수 있는 민중음악이다. 그 세련도에 따라서 어떤 음악도 따를 수 없는 독창적인 분위기를 창출해 내기도 한다.
풍년 농악 <황분련 작사 / 이광자 작곡> 1. 봄에는 씨앗뿌려 못자리 돌보고 초여름엔 모내기 서로서로 도우세 한여름엔 김매기 정성들여 가꾸어 가면 앞마을에 풍년들고 뒷마을에 풍년일세 어깨춤이 절로난다 얼씨구 절씨구 좋구나 올해도 풍년일세 풍년일세 풍년일세 2. 우리네 살림살이 농사가 제일 가을들판 추수마당 서로힘을 모으세 노적가리 높이높이 올려라 올리어라 앞마을에 풍년들고 뒷마을에 풍년일세 어깨춤이 절로난다 얼씨구 절씨구 좋구나 올해도 풍년일세 풍년일세 풍년일세 (와~ 풍년!) 한해 수확을 마치고 신명나게 즐거움을 만끽하며 풍년 농악을 울린다.
마패(馬牌)는 대소 관원이 공사(公事)로 지방에 나갈 때 역마(驛馬)를 징발할 수 있는 증빙(證憑)으로 사용하던 패이다.
고려시대 역참제(驛站制)와 파발제(擺撥制)에 의한 통신의 중요한 수단으로 말을 사용하게 되면서 그 규제를 위하여 마패제(馬牌制)가 실시되었다. 이 제도는 그대로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1435년(세종 17)에는 새로 마패를 만들어 왕족 ․관찰사 ․절제사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 ․개성유수 등에게 발급하고 구패는 회수하였다. 이 신패는 조선 후기까지 똑같은 형태로 유지되고 주조(鑄造)만 거듭되었다.
국민적 합심과 평화를 위하고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곧은 정신으로 바르게 살라는 뜻에서 대나무와 불의를 이겨내는 의지를 표현하였다.
우리는 ‘마패(馬牌)’하면 암행어사들이 놋쇠로 된 둥근 마패를 번쩍 들어 ‘암행어사 출두요~’ 라고 외치면 휘하의 수많은 역졸들이 육모방망이를 들고 탐관오리들을 징벌하는 것을 연상한다. 마패는 역마(驛馬)의 지급을 규정하는 패이며 발마패(發馬牌)라고도 한다. 특히 위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 중 글자 하나는 밀납으로 특수하게 본을 만들어 조금씩 다르게 만들었다.
타. 12월 화투의 작성배경과 의미
1) 화투 작성의 배경
대나무는 《삼국유사》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피리를 통해 남녀음양의 이치를 상징하면서 안식과 평화를 상징하였으며 이것은 통일신라시대를 지탱한 국민적 합심과 평화를 상징한 것이다. 또한 대나무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㰡대쪽같은 사람㰡으로 불의나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군자의 행실에 비유된다.
대나무는 번식력이 강하고 상록인 점에서 소나무와 비견되는 영생과 불변을 상징한다. 대나무는 신을 부르거나 내리게 하는 신대로 사용되는 점에서 신화적 상징성을 유추하게 된다. 즉 대나무는 신령의 집, 신령의 통로 등을 상징한다.
아리랑은 ‘한국인이 즐겨 부르는 노래’와 ‘월드컵 응원가 모음’에 포함된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숙한 한국의 대표적 민요로 국내외에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나 그 민족의 영혼을 사로잡는 노래가 있다. 언제부터 누가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아리랑 민족이라고 불릴 만큼 지구촌 어느 곳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든지, 아리랑 노래만 나오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고이는 경우가 많다.
아리랑은 지역별로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은 정선아리랑, 강원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이 있다. ‘경기아리랑’ 또는 ‘신아리랑’이라 불리는 아리랑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아리랑>이라는 후렴이 들어 있는 구전민요이고 아리랑은 대체로 3음보와 세마치장단으로 이루어진 서정민요이며 시형식은 2행시로 되어 있어 간결하다. 특정한 생활상의 기능을 가진 민요는 아니지만 민중생활의 순간순간의 비애와 애환을 반영하고 있으며, 조선 말기 이후부터 일제강점기에는 제국주의에 항거하여 민족적 감정과 울분을 호소하고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근대 민요의 역할을 하였다.
아리랑이 언제부터 우리민족에게 애창되었는가에 대한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삼국시대에 이미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며, 둘째는 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공사를 시작한 1870년 즈음에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다. 셋째는 이와는 달리 정확한 시기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밀양의 영남루에 얽힌 아랑(阿娘)의 전설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아랑설(阿娘說)․알영설(閼英說)․알영고개설을 비롯하여 대원군시대를 유래의 시점으로 보는 아이롱설(我耳聾說)․아난리설(我難離說)․아리랑설(我離娘說)․아랑위설(兒郞偉說) 등이 있다. 이 밖에 양주동(梁柱東)이나 이병도 등의 학자에 의해 아리랑이 옛 지명이라는 설도 제기되어 있으나 아직까지 아리랑의 성립시기나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정설은 없다. 이러한 설들은 아리랑이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된 것이다. 그러나 《닐늬리》 《청산별곡》 《군마대왕(軍馬大王)》의 후렴구처럼 아리랑도 관악기의 구음(口音)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설이다.
일지, 희망의 편지 중에서 아리랑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十里)도 못가서 발병난다”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을 연가(戀歌)로 잘못 알고 있다. 아리랑은 단순한 연가가 아니라, 깊고 심오한 정신세계를 표현한 노래이다.
아리랑은나 아(我), ‘이치 리(理), ‘즐거울 랑(朗)이다. 참 나를 깨닫는 즐거움을 노래한 것이다. ‘참 나를 깨닫는 즐거움이여, 참 나를 깨닫는 즐거움이여’ 참 나를 깨닫기 위해서는 인생에 어려움과 고비가 있기 마련이며 그 어려움과 고비를 고개라고 표현한 것이며,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참 나를 깨닫기 위해 어려운 위기와 고비를 극복한다는 의미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참 나를 깨닫기를 포기하는 사람을 의미이며, '십'은 동양에서는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인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장애가 생긴다는 것이다.
참 나를 깨닫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완성을 이루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아리랑 속에는 깨달음과 인간완성을 향한 순수한 열망이 녹아들어 있다.
여러 가지 가사로, 가락으로 변형되어 전래되어 왔지만, 인간의 진정한 의미와 삶의 가치가 담겨 있기에 수 천년 동안 우리의 입으로, 가슴으로 전래된 것이다.
‘ 아리랑에는 깨달음이 있고 ’아리랑에는 순수한 영혼에 대한 열망이 있으며 아리랑에는 한민족의 혼이 있다.
이 의미를 가슴에 담고 아리랑을 불러보면 우리 안에 '참' 나의 환한 빛이 있음을 느낄 것이며 인생의 진정한 희망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리랑 가사는 아래와 같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아리랑은 '××아리랑'이라고 하여 뒤에 '아리랑'을 붙인 다른 아리랑과 구별하기 위해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도 한다. 어느 때부터 불리기 시작하였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고대로부터 조금씩 첨가·개조되면서 오늘의 노래가 이루어진 듯하다.
남녀 노소 사이에서 가장 널리 애창되는 이 노래의 기본 장단은 세마치장단으로 우리의 정서에 알맞고, 내용도 한말(韓末)에서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이 겨레의 비분을 표백(表白)한 것으로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 별조(別調)아리랑이 불리며, 장단과 사설(辭說)도 매우 다양하다. 즉 《본조아리랑》 《신아리랑》은 현재의 곡조와 같으나, 이 밖에도 《밀양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긴아리랑》 《별조아리랑》 《아리랑세상》 등 종류가 매우 많고, 그 유래설(由來說) 또한 갖가지이다.
① 아랑설(阿娘說):옛날 밀양 사또의 딸 아랑이 통인(通引)의 요구에 항거하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일을 애도한 데서 비롯하였다. ② 알영설(閼英說):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 알영을 찬미하여 ‘알영 알영’하고 노래부른 것이 '아리랑 아리랑'으로 변하였다. ③ 아이롱설(我耳聾說):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백성들이 원납금(願納金) 성화에 못견뎌 "단원아이롱 불문원납성(但願我耳聾不聞願納聲:원하노니 내 귀나 어두워져라, 원납소리 듣기도 싫구나" 하고 부른 '아이롱(我耳聾)'이 '아리랑'으로 와전되었다.
④ 아리랑설(我離娘說):역시 흥선대원군시절 경복궁 공사에 부역온 인부들이 부모처자가 있는 고향 생각을 하며 '아리랑(我離娘) 아리랑' 노래한 것이 발단이었다는 등의 유래가 있다. 이 밖에도 다른 발생설이 전하나 오히려 구음(口音)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유래하였다고 봄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이 노래는 외국에도 널리 소개되어 세계적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출처] 아리랑 | 네이버 백과사전
진돗개 (珍島- )는 개 품종 중 하나로, 한국의 대표적인 사냥개이다. 용맹하고 충성심이 강해 주인을 잘 따른다. 그러나 한 주인에게 매이는 성격이 너무 강한지라 사역견으로는 못 쓴다. 털은 주로 노란 것(황구, 黃狗)과 흰 것(백구, 白狗)이 있으며, 그 외 재구, 네눈박이, 호구, 흑구(黑狗) 등 10여 종류의 다양한 것이 있다. 귀가 쫑긋 서 있고 꼬리는 위로 말려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2년 진도 특산인 진돗개를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1967년에는 〈한국진돗개보존육성법〉이 제정되어 혈통이 보존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2005년 케널 클럽(KC)과 세계애견연맹(FCI)에 정식 품종으로 등록됐다. 2012년 4월, 진돗개의 총유전체가 모두 해독되었다. 개 품종으로 총유전체가 해독된 경우는 독일의 개 복서 이후 두 번째이다. 무지개는 순수한 우리 고유어로서 ‘물’과 ‘지게’라는 말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로서 ‘물’은 水를 뜻하고 ‘지게’는 지금은 잘 안 쓰지만 戶나 門을 뜻하는우리 말이다. 그래서 한자 ‘戶’를 ‘지게 호’라고 읽고 있으며 그러니까 ‘무지개’라는 이름에 들어있는 뜻은 ‘물로 이루어진 문’ 정도가 되겠다.
15세기에 나온 책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므지게’라는 단어가 있으며 그 당시에는 ‘물’이 ‘믈’이었고, ‘믈’과 ‘지게’가 연결될 경우 ᄅ이 탈락하여 즉 ‘믈지게’에서 ᄅ이 떨어진 것이 바로 ‘므지게’이고, 이것이 후대로 오면서 음이 변하여 오늘날의 ‘무지개’가 된 것이다.
하늘에 무지개가 생기는 것은 공기 중에 있는 물방울이 빛을 분리시키는 것이고, 기름위의 무지개는 물과 기름막에 의해 빛이 분해되는 것이고, 분무기에 의해 생기는 무지개는 분무기에 의해 나온 물방울에 의해 빛이 분해되는 것이다. 프리즘에 의해 생기는 무지개는 유리에 의해 빛이 분해된 것이다. 비가 온 후 밝은 햇살이 비추는 곳에서 무지개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비가 갠 후라고 해서 항상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지개를 보려면 공기 중에 물방울이 많은 상태일 때 태양을 등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태양빛이 물방울로 들어가서 반사되어 나올 수 있다.이 때, 물방울이 빛을 분해하는 프리즘 역할을 하는 것이고 태양빛이 물방울로 입사할 때 굴절된 빛이 물방울 뒷표면에서 나오다가 다시 한번 굴절되면 우리의 눈에는 일곱 가지 색으로 분해된 무지개가 보이게 된다.
<여기에 있는 자료는 인터넷에서 인용했습니다.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